대한민국 제1호 VI – ▣서울대총장▣변호사▣우표▣기상재해▣PC▣대통령전용기▣외환▣간척▣공채탤런트+여사관생도▣개신교회▣에어컨▣국회의장▣철도+청와대 대변인▣국립공원+인간문화재+정무장관
서울대 초대 총장의 해리·앙스텟도(Harry Bidwell Ansted) 제2대 총장 이 충호 박사지만 외국인 총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앙스텟도 총장 선임은 1년 2개월 후의 1947년 10월 25일 이 준호 씨<오른쪽 아래 사진>이학 박사에게 총장 자리를 내줬다.서울대 2대 총장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대 총장이라는 것이다.이 전 총장은 동맹 휴학과 등록 거부 등을 무사히 마쳤지만 1948년에 사임하면서 6·25전쟁 때 납북됐다.현 이장무(이·쟈은무)총장은 제24대 총장이다.서울대 총장은 1991년 또 하나의 ” 제1호”의 역사를 쓰게 된다.김정은 교수(영문과)가 첫 직선제 총장이 된 것이다.김 총장은 당시 교수의 90.7%가 참여한 투표에서 과반수를 훨씬 웃돌아 초대 직선제 총장으로 나갔다.김 총장 이전까지는 서울대 총장은 문교부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명직이었다.1989년 2월 28일 열린 총장 선출 방식에 대한 공청회에서 “총장 후보 지명 위원회가 선정·제시한 후보 5~10명을 대상으로 전 교수가 직접 투표하는 두 이상의 최종 후보자”를 선출하는 방식이 확정되면서 2006년 제24대 총장 선거부터는 학교 직원도 혼자 0.1표로 총장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서울대의 전신인 일제 강점하의 국립 대학에서 일본이 세운 6번째 제국 대학인 경성 제국 대학은 1924년 5월 하루에 2년 과정의 예과(학부 진학을 위한 예비 과정)만으로 출발했다.법문 학부와 4년제 의학부가 생긴 것은 2년 후에 예과 첫 졸업생이 나오면서였다.본과가 되어 본격적인 경성 제국 대학이 만들어지고 경성 제국 대학의 초대 총장에는 핫토리 우지길 동경 제대 교수(문학부)가 취임했다.1924년 아리요시 주이치 조선 총독부 정무 총감이 예과 총장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대학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뒤 초대 총장은 핫토리 우노 요시 총장과 평가되고 있다.경성 제국 대학은 해방과 함께 경성 대학으로 개칭하고 그 후 1946년에 설립된 서울 대학에 통합되었다.[출처]:이영민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1)서울대 총장-미 군정청 부서 앙스텟도 미군 대위 임명/조선 일보 2010년 5월 12일 변호사-홍·지에기, 법원에서 최초의 인가를 받아 한국 법조계에서 “1호 변호사”로 알려진 것은 홍·지에기 변호사(오른쪽 사진)이다.대한 제국이 변호사 법을 공포한 이듬해인 1906년 7월 홍·지에기 이·묘은우, 정·묘은소프 등 3명이 당시 법무 담당 관청인 법부에서 변호사 인가증을 받았지만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등록증을 받은 홍·지에기이 “1호 변호사”가 된 것이다.정부 수립 후의 “대한민국 1호 변호사”의 기록은 확실하지 않아.대한 변호사 협회의 회원 등록부에 따르면 정부 수립을 선언한 3일 후의 1948년 8월 18일 킨쇼 레츠(김·종렬)변호사가 등록한 것이다.적어도 변협 기록상으로는 “대한민국 1호 변호사”인 셈이다.그러나 그의 활동 기록이 자세히 남지 않고 당시 일제 시대와 미 군정기의 판사·검사 등으로 활동하던 법조인들이 속속 변호사로 등록한 시기라는 점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대한민국과 대한 제국을 통해서 폰·지에기 선생님을 “1호 변호사”로 인정하고 있다.
경성 일본 대심원의 홍재기(홍·지에기)변호사는 1873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1902년 7월에 도쿄 법 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로스 앤젤레스에서도 유학했다”해외파”이었다.1904년 12월에 귀국하는 다음해 사립 한성 법학부와 보성 전문 학교 강사로 법학자들을 가르치고 한반도를 노리던 일본에 대항하고 근대적 독립 국가 건설을 주창한 “헌정 연구회”의 멤버로도 활동했다.그는 당시 최고 법원이었다 대심원<왼쪽 사진>의 판사로도 활동하면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억압되는 조선인 때문에 많은 변호 활동을 하고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80세를 바라보는 나이로 납치됐다.소수이지만”1호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라는 의견도 있다.대한 변호사 협회 관계자는 “협회 소장 『 변호사 명단 1호 』의 주인공이 조선 일보 사장 등을 지낸 유 문환으로 기재되어 있고,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있다”라고 말했다.반면”대한민국 1호 여성 변호사”에 대해서는 논란도 없어 기록도 많다.1951년 여성 최초의 고등 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대영 박사(1914~1998)는 “첫 여성 변호사”인 인권 운동가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38세로 고등 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지만 야당 정치인(고 전·일효은 박사)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이승만(이·승만)대통령이 판사 임명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이 타이 에이(이·태영)변호사는 1956년”한국 가정 법률 상담소”를 설립한 뒤 39년 마도장직을 맡아”축하 첩 반대 운동””동성 동본 금혼제 폐지 운동”등을 주도하고 법률상의 남녀 불평등을 없애기에 평생 헌신했다.19세기 후반부터 “송사””율사””대언인”등의 이름으로 알려졌지만,”변호사”라는 명칭이 등장한 지 100여년이 지났다.그 1세기 동안 변호사의 수도 크게 늘어 현재 대한 변호사 협회에 등록된 회원 수는 1만 1667명에 이른다.[출처]:정·지섭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2. 변호사-홍·지에기, 법부에서 최초의 인가증을 받는다/조선 일보 2010.5.19.3, 우표-비둘기 무궁화로 장식된 정부 수립 기념 우표”각국과 통상을 하고 이후 안팎에 관계된 것이 날로 증가하여 국가 무역에 관한 소식이 그에 따른 늘고 있다.(중략)그래서 우정 총국을 설립하도록 명하면 충분하지 않나.”(고종 실록)한국 근대 우편의 시작은 1884년 4월 22일 고종이 이런 칙령을 내린 것에서 비롯됐다.고종은 한국의 근대 우편의 선구자인 홍 영식(홍·용식, 1855~1884)선생을 초대 우정 총 도장에 임명했다.7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서 우정 총국은 1884년 11월 18일 역사적인 첫 업무를 시작했다.이 때 발행한 우표가 바로<위의 사진>이다.”문위”라는 이름은 우표가 발행된 당시의 화폐 단위가 “문”였기 때문에 이후 수집가들이 붙였다는 것이다.문위 우표 발행 당시에는 우표라는 이름 대신”우 조”이라는 단어를 썼다.이 때문에 문위 우표의 앞면에는 “COREAN POST”이란 영문과 함께” 대조선국 우초”라는 글이 나온다.
1884년 11월 18일 최초의 우표발행문위보통
고종황제 즉위 49주년 기념우표 1902년 10월 18일 발행정부 수립 기념 우표 1948년 8월 15일 발행 정부 수립 후 첫 우표 이 우표의 발행 주체는 ” 대조선국”이다.그러나 디자인에서 인쇄까지 제조 작업은 모두 일본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이뤄졌다.우정 사업 본부가 발행한 “한국 우정 100년사”에 따르면 문 때문에 우표는 5종에 이르는 총 280만장을 발행했다.이 중 5문 우표(50만장)와 10문 우표(100만장)은 일부 일반에 판매했으나 다른 3종(25문·50문·100문)은 일본에서 늦게 도착한 때문에 세상을 보지 못 했다.그 해 12월, 우정 총국 개국 연회에서 갑신 정변이 일어나고 이것이 실패로 마지막 우정 총국이 폐업했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우표<가장 아래 사진>는 1948년 8월 15일에 발행된 정부 수립 기념 우표다.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나라의 꽃 무궁화를 도안으로 핬으나 각각 5만장씩 발행했다.국가적 행사나 사건을 기리는 기념 우표에도 1호가 있다.한국 최초의 기념 우표<가운데 사진>는 1902년 10월 18일에 발행됐으나 고종 즉위 40주년과 60세를 기념한 것이다.해방 1주년 기념 우표 1946년 5월 하루 1946년 5월 하루는 “해방 1주년 기념 우표”가 나왔다.한국에는 1945년 해방 직후에 우표를 발행하는 시설이 없었다.이 때문에 미 군정은 정상적인 우표를 발행할 때까지 일본 우표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거듭 사용하고”해방 1주년 기념 우표”을 발행하면서 일본 우표 사용을 금지했다.해방 1주년 기념 우표, 1946년 5월 1일 1946년 5월 1일에는 해방 1주년 기념 우표가 나왔다. 한국에는 1945년 해방 직후 우표를 발행할 시설이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정상적인 우표를 발행할 때까지 일본 우표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거듭 사용하고 해방 1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하면서 일본 우표 사용을 금지했다.▲ 태풍 사라가 지나간 후 망연자실하고 앉아 있는 이재민들 소방청이 지난해 6월에 출간된 “재난 관리 60년사”는 그 후 1950년대 중반까지 총 6차례 태풍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태풍의 이름과 피해 규모 등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58년 9월 4일 태풍”그레이스(GRACE)”이었다.당시 전북 전주 조 루라북도·청주)등에 366.5㎜의 폭우를 뿌렸다 이 태풍으로 전국적으로 이재민이 1만 3477명 발생하고 1만 445채의 건물 피해와 263억 2900만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건국 이후 사망자 수가 처음으로 집계된 태풍은 1959년 9월 15~18일에 발생하고 제주도와 남부 지방을 강타한 제14호 태풍” 사라(SARAH)”이었다.전국적으로 849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으며 부상자는 2533명, 재산 피해액은 2043억원을 넘었다.이러한 사망자 수는 건국 이후 태풍 가운데 최대 규모다.당시 낙동강, 섬진강 등이 홍수로 범람하고 육·해상 교통과 전기·전화 등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에 부산 등 남부 지방의 주요 도시는 고립 상태에 빠져야 했다.하루 적설량이 20㎝를 넘어선 최초의 폭설은 1949년 1월 16일 울릉도에 내린 24.7㎝이었다.내륙 지방에서는 1950년 1월 30일 강원 강릉에 내린 27.4㎝로 4일 서울 지방에 내린 25.8㎝의 폭설 기록을 능가했다.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30분에는 건국 이래 최초의 대형 인적 재해 사고가 발생했다.서울시가 마포구 쿠라타동 마포그·장전동 흐시 우시산(와우산 일대에 들어선 지상 5층, 15채 규모의 흐시 우시 아파트가 순식간에 붕괴한 이 붕괴 사고로 잠자던 주민 33명이 숨지고 40명이 부상했다.1953년 11월 27일 오후 7시에 발생한 부산 역 현장 대형 화재에서 1953년 11월 27일 오후 7시에 발생한 “부산 역 화재 사건”이 건국 1호이다.부산시 중구 영주동 프상시·츄은그·영 쥬동)1가 45번지의 부산 역 근처의 한 가정에서, 풍로 불이 다다미로 옮아 붙은 것부터 시작된 이 화재로 부산시 중구 프상시·츄은그)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인 1.4평방 킬로미터에 있는 가옥 3132채가 전소되면서 29명이 숨지고 6000여가구,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출처]:이·성훈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기상 재해, 58년 태풍”그레이스”이재민 1만 3천 여명/조선 일보 2010년 1월 16일 5일 PC-81년 삼보 엔지니어링이 SE-8001개발PC, 81년 삼보 엔지니어링이 SE-8001개발국 내에서 공식 업무에 사용된 최초의 컴퓨터는 1967년 경제 기획원 통계국이 인구 조사 분석 때문에 미국 IBM에서 수입한 “IBM1401″이다.비슷한 시기에 생산성 본부도 후지쯔의 “파 컴 222″를 도입했다.이후 정부 기관과 기업을 중심으로 업무용 컴퓨터가 잇달아 도입되면서 국내 컴퓨터의 역사는 시작됐다.사실 이에 앞서고 국내에서도 1962년 8월 한양 대학교 전기 공학과 이·망용 박사가 청계천을 돌며 요구한 부품을 모아 소형 전자 계산기(computer)를 한 적이 있다.하지만 항공기·유도탄 등 관련 산업이 없었던 상황에서 정부도 고성능 컴퓨터 개발을 지원하는 경제적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박사의 컴퓨터는 상용화하지 못한 채 잊혀졌다.그리고 1980년 7월 2일 이·용테 씨를 비롯한 7명의 젊은이들이 서울 청계천 세운 상가에 모여자본금 1000만원에서 삼보 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이 회사는 설립 6개월 후의 1981년 1월 SE-8001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국내에서 처음 상품화된 컴퓨터(PC)이다.PC(Personal Computer)는 IBM이 발표한 “IBM PC”라는 고유 상표 이름에 유래하는 단어에서 1개 중앙 처리 장치(CPU)를 여러 단말이 공유하는 형태의 이전 컴퓨터와 비교하고 1개의 CPU을 1개의 단말로서 사용하는 컴퓨터를 의미한다.Trigem 20SE-8001은 텔레비전 수상기에 전동 타자기가 달린 형태로 CPU속도는 1MHz였다.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110만원의 일반 PC의 CPU속도(약 2.5GHz)과 비교하면 2500분의 1수준인 셈이다.가격은 1000만원.당시 대기업의 대졸 초임이 25만원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정용으로 사용하려면 값이 비쌌다.그래서 이 PC는 주로 기업 회계 관리용 일부가 캐나다에 수출되기도 했지만 대량 생산·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국내에서 처음 가정에 보급하는 상용화한 PC는 삼보가 1982년에 개발한 2번째 PC”트라이 젬 20″이었다.가격은 42만 9000원으로 여전히 높았지만 1982~1983년에 6000대가 팔렸으며 이 중 개인이 구입한 수가 1000대였다.트라이 젬 20의 성공은 금성사(현 LG전자), 삼성 전자 대우 전자 등 대기업의 PC시장 진출을 초래했다.정부가 1983·1989년에 2차례 학교 전산실을 만드는 컴퓨터를 보급한 “교육용 컴퓨터 보급 계획”에서 컴퓨터는 개별 가정에 확산되면서 이후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컴퓨터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다.지난해 11월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젼스·유닛(EIU)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PC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60대, 초고속 인터넷 망은 전체 가구의 92%에 깔린 것으로 나타났다.[출처]:조선 일보 산업부 IT팀의 장·차 기자:<대한민국 제1호>-PC-81년 삼보 엔지니어링이 SE-8001개발/조선 일보 2010년 2월 16일 6일 대통령 전용기-나·승만 대통령 때 C-47수송기 첫 이용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는 군용기에서 비롯됐다.한국 전쟁 기간 중 이승만(이·승만)대통령이 전용기로 잠시 이용한 C47다코타 수송기가 “대통령 전용기 1호”이었다.L-26(U-4)에어로 커맨더(Aero Commander)기 이후 정부는 1954년 3월 24일 주한 미군으로부터 L-26에어로 커맨더(Aero Commander)편 3대를 물려받아 대통령 전용기로만 사용했다.이 비행기는 공군의 주요 지휘관과 인사 전용기로 이용됐다.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처음으로 이용한 민간 전세기는 록히드사의 “별자리”항공기, 한국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처음으로 이용한 민간 전세기는 록히드사의 “별자리”항공기<사진>이다.1961년 11월 박정희(박·정희)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비행기를 대통령 전용기로만 사용했다.이 항공기는 1960년대까지 세계 항공 시장을 주름잡았던 60~90인승 프로펠러 항공기이다.미국의 전설적인 항공 재벌 하워드·퓨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애비 에이터”에도 등장한 기종이다.총 856대가 제작된 베스트 셀러 항공기였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항공기는 55대에 불과하다.이어 1966년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은 더글러스사의 “VC-54수송기”를 대통령 전용기로 도입했다.이 수송기는 대통령을 비롯한 VIP수송기로 1992년까지 운항됐다.현재 강릉 안인진리”통일 안보 공원”에 전시되고 있다.전용기 안의 집무실의 좌석에는 봉황이 새겨졌고, 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걸렸다.비행기 뒤쪽에는 침실도 마련되어 있었다.그러나 이 수송기는 크기가 작아 장거리 비행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그래서 장거리 여행 때는 대통령 전용기를 빌려서 사용했다.HS-748VC-54는 기체 탐승 가능 40인승으로 작아 박 대통령 시절 영국산 HS-748을 도입했는데 주로 VC-54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전두환(정·두한)대통령 전용기로 보잉 737-3Z8기종을 도입한 정부는 1985년 당시 전두환(정·두한)대통령 전용기로 보잉 737-3Z8기종을 도입했다.기체 앞부분에 집무실 등 대통령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상당한 내부 변경이 이루어지고 탑승 인원은 40명 안팎에 제한되고 있었다고 한다.대통령 전용기답게 레이더 경보 수신기,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도 갖추고 있었다.하지만 탑승 인원이 적고 항속 거리가 짧아 국내나 일본·필리핀 등 근거리 국가 방문 때만 이용된다.대통령이 미국·유럽 등 장거리 비행을 할 때에는 대한 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를 번갈아 빌려서 사용했다.이 전세기는 “코드 원(Code One)”로 불린다.코드 원으로는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반 1999년까지 대한 항공 비행기만 이용했으나 그 해 12월 16일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도 함께 전용기로 이용하고 경쟁 입찰을 통해서 두 항공사의 비행기를 번갈아 이용하고 있다.대한 항공 관계자는 “코드 원은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낮지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참여하는 “로 “대통령 전용기 내부 인테리어 공사 등에 통상 6개월 이상 걸릴 “이라고 말했다.올해 초 정부가 실시한 대통령 전용기의 임차 도입 입찰에서는 대한 항공 보잉 747-400이 선정됐다.이 전세기는 올해 4월 하루에서 15년까지 5년간 대통령 전용기로만 사용된다.이용 요금은 2004년 기준으로 1회에 약 8~9억원의 이용료를 지출한다.대통령 전용기로 새로 도입된 신형 공군 1호기 보잉 747-8i대통령 전용기로 새로 도입된 신형 공군 1호기 보잉 747-8i미국이 한국 정부가 정한 고정 환율을 적용하지 않고 달러를 공매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1954년 한국과 미국은 협정을 맺고 환율을 1달러=500원에 고정하는 조치를 취했다.1964년이 되면 고정 환율제는 단일 변동 환율 제도로 바뀌게 된다.단일 변동 환율 제도는 1달러=255원을 하한선을 정하고 시장에서 자유롭게 형성되는 환율로 거래를 하는 제도였다.하지만 하한선이 기준 환율 역할을 하면서 변동 환율제라는 명칭과 달리 사실상원-달러 환율을 고정시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그래서 한국의 경제 환경과 상관 없이 타율적으로 미국 달러화의 움직임으로 원화 가치가 정해졌다.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며 1980년 2월 들어 미국 달러화뿐 아니라 일본 엔화, 파운드 등 주요국 통화의 가치조차 반영하고 환율을 결정하는 “복수 통화 바스켓 제도”에 바꾸게 된다.그러나 이것도 통화 바스켓(바구니)에 어느 통화를 어떤 비율로 넣을지는 한은과 재무부가 정했기 때문에 완전한 변동 환율제가 아니었다.1990년 3월에 “시장 평균 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한국은 실질적인 변동 환율 제도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된다.기준 환율 시장 평균 환율은 전날, 은행 간 거래한 환율을 평균하였다.은행 간 거래 환율은 기준 환율을 기준으로 하루에 상하로 0.4%변동할 수 있도록 제한한<사진>(1997년 12월 외환 위기로 1달러=1771원으로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을 은행 환전 창구 직원이 게시판에 올리고 있다).한국은 그 뒤 하루 변동 제한폭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07년 12월 외환 위기 때 완전히 폐지했다.완전한 변동 환율 제도인 “자유 변동 환율 제도”에 이행하게 된 것이다.현재 한국의 원화 가치는 한국 자금 중개, 서울 외환 중개 2개의 외환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출처]:빵·현철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외환 제도-48년 1달러 450원 고정 환율제로 출발/조선 일보 2010년 5월 25일 8일 간척 사업-1963년”톨망테”공법으로 계화. 섬 간척 개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주도로 간척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1960년 농경지 확장 5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1963년부터 히가시 츠노에 하구에서 총 4000ha정도를 매립 작업에서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전북 부안군 계화. 간척 사업<사진>이었다.방조제 공사에는 이전까지 쓰던 씨름판, 큰 암석이 아닌 철망대에 돌을 넣어 만든 덩어리를 물 통제를 내보낸다”돌망 다이 공법”가 세계 최초로 적용됐다.아침 저녁의 차이가 큰 유속이 6~7m/s에서 빠른 서해안에 적합한 공법이다.조성된 간척지에는 섬진강 댐 건설로 된 수몰민 2700여가구가 이주하고 농사를 했다.여기에서는 풍부한 일조량과 적은 병해충에서 우수한 품질의 쌀이 생산됐다.미국이 한국 정부가 정한 고정환율을 적용하지 않고 달러를 공매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1954년 한국 정부와 미국은 협정을 맺고 환율을 1달러=500원으로 고정하는 조치를 취했다.1964년이 되면 고정환 제도는 단일 변동환 제도로 바뀌게 된다. 단일변동환율제도는 1달러=255원을 하한선으로 정해 시장에서 자유롭게 형성되는 환율에 따라 거래를 하게 하는 제도였다.그러나 하한선이 기준환율 기능을 하면서 변동환율제라는 명칭과 달리 사실상 원화 환율을 고정시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여건과 상관없이 타율적으로 미국 달러화의 움직임에 따라 원화가치가 결정됐다.이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980년 2월 들어 미국 달러화뿐 아니라 일본 엔화 영국 파운드 등 주요국 통화의 가치까지 반영해 환율을 결정하는 복수 통화 바스켓 제도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통화바스켓(바구니)에 어떤 통화를 어느 비율로 넣을지는 한은과 재무부가 결정했기 때문에 완전한 변동환율제는 아니었다.1990년 3월 시장평균환율제를 채택하면서 한국은 실질적인 변동환율제로 한발짝 더 나아가게 된다. 기준환율(시장평균환율)은 전날 은행 간 거래한 환율을 평균 산출했다. 은행 간 거래환율은 기준환율을 기준으로 하루에 위아래로 0.4%포인트 변동할 수 있도록 제한한 <사진>(1997년 12월 외환위기로 1달러=1771원으로 급등한 원화환율을 은행 환전창구 직원이 게시판에 올리고 있다).한국은 이후 하루 변동제한폭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2007년 12월 외환위기 때 완전히 폐지했다. 완전한 변동환 제도인 자유변동환 제도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원화 환율은 한국자금중개, 서울외환중개 등 2개 외환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출처] : 방현철 조선일보 기자 : <대한민국 제1호> – 외환제도 – 48년 1달러 450원 고정환율제로 출발 / 조선일보, 2010년 5월 25일 8일 간척사업 – 1963년 <돌망태> 공법으로 계화도 간척 개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가 주도로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1960년 농경지 확장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1963년부터 동진강 하구에서 총 4000여㏊를 매립하는 작업으로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다. 전북 부안군 계화 간척사업 <사진>이었다.방조제 공사에는 이전까지 쓰던 씨름판, 큰 바위가 아닌 철망대에 돌을 넣어 만든 덩어리를 물막이로 투입하는 ‘석망대 공법’이 세계 최초로 적용됐다. 조석 차이가 크고 유속이 6~7m/s로 빠른 서해안에 적합한 공법이었다. 조성된 간척지에는 섬진강 댐 건설로 생긴 수몰민 2700여 가구가 이주해 와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풍부한 일조량과 적은 병해충으로 우수한 품질의 쌀이 생산되었다.전북 부안군 계화. 간척 사업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의 첫 간척 사업은 1235년 고려 시대 강화도에 세운 해안 제방이 꼽힌다.농림 수산 식품부가 지난해 11월에 출간된 “간척 백서”은 해안 제방이 몽골군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그 안쪽에 간척지가 개발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고 설명했다.이어 1248년에는 평안도 청천 하구에 물 막이 제방이 건설되어 1253·1256년 강화도에 다른 간척 사업이 이뤄졌다.서기 330년 백제 미도리 뼈 현(현 전북 김제시)에 둑 길이만 3.3km에 이르는 벽골제가 만들어졌다.이런 기록을 보면 한국 조상들은 뛰어난 둑쌓기기술로 예로부터 간척 사업을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조선 시대 1818년 다산 전·약용이 출판한 마키 민심서에는 방조제·배수 갑문 축조 방법 등이 실렸다.1900년대 들어 간척 사업은 개인 중심으로 이뤄졌다.조선 일보 제9대 사장을 지낸 계초 쪽 응모도 훗날 민족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추진하고 언론·조림 요리·육영과 함께 간척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카츠라 풀은 1935년부터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경기·화성 선군·펜팔 탄묘은)에서 약 2년 간척 사업을 하고 농장 100만평을 조성했다.간척 사업이 현대적 공법을 사용하여 대규모로 진행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1960~1970년대였다.이 시기에는 간척 사업 선진국인 네덜란드에서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간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1965년에는 김해·목포·서산 등 7지구 5만 3271ha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간척 사업이 추진되기도 했다.지난 달 27일 세계 최장 33.9km의 방조제가 착공 19년 만에 완공된 새만금 간척 사업은 한반도 지도를 바꿨다.한국의 국토 면적은 10만 140평방 킬로미터에서 간척 후 10만 541㎢로 0.4%확장됐다.간척 사업을 통하여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만 100ha(호수를 포함)이 새로 생기게 된 셈이다.1960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모두 1634지구(9만 685ha)에서 간척 사업이 시행됐고 지금도 7지구(4만 4415ha)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다.[출처]:조선 일보의 최·형석 기자:<대한민국 제1호>-간척 사업-63년”톨망테”공법으로 계화. 섬 간척 개시/조선 일보 2010년 5월 27일 9일 공채 탤런트-1961년 KBS의 김·혜자, 오·현경 등 26명을 뽑고 오·현경(74)김·혜자(69)윤·서정(66), 임·형식(65)김·애경(58)···.현재 텔레비전과 연극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이들 중견 배우는 모두 지상파 방송사의 “공채 탤런트 1기”출신이다.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활발하던 방송국”공채 탤런트”제도는 당시 스타로 부상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각 방송국은 매년 20~40명씩 탤런트를 꼽고 그들은 전속 기간에 해당 방송 프로그램에만 출연할 수 있었다.처음에 공채 탤런트를 선택한 것은 1961년 개국한 KBS. 첫 시험에서는 카메라 테스트 없이 서류 전형과 면접 실기 시험(연기)만으로 택했다.2600여명이 모였으며 이 중 26명이 뽑혔다.그들 대부분은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을 중단했다.07년 폐 암으로 숨진 최·길 허 씨처럼 이미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현재 활동 중 대표적인 KBS 제1기 탤런트는 KBS드라마”제빵 왕 김·탁구”에서 시어머니 역을 맡은 정·혜선(68)을 비롯한 연극”베니스의 상인”등에서 노 마스장을 과시한 오·현경,”국민의 어머니”으로 불리는 김·혜자, 지난해까지 KBS드라마”시티 홀”에 출연한 박·학원 가(68), SBS드라마”인생은 아름다운 “에 출연 중인 최·정훈(70)씨 등이 있다.박 병호(박·뵤은호, 72)씨도 “텔아 “(08)와 “무인 시대”(03)에 출연한 1기 출신이다.KBS공채 1기 탤런트-김혜자, 오 현 경(오…현경), 정에 선(정·혜성)후보의 발주자인 TBC와 MBC도 공개 채용 시험에 뛰어들었다.1963년 최초 공개 채용 시험을 받은 TBC는 연극인 겸 탤런트 윤·서정과 최근 더 활동 폭이 커진 이·이순재(75)를 배출했다.선우·용 요(65)는 TBC공채 1기 무용가로서 데뷔했다가 탤런트로 전업한 경우.1969년 개국과 동시에 공채를 실시한 MBC는 개성적인 조연 연기로 사랑 받아 오던 임·형식과 김·애경 조·굔 팬(65),”전원 일기”의 “일연”박·은수(58)등을 1기에 배출했다.TBC 공채 1기 탤런트 – 윤소정, 이순재MBC공채 1기 탤런트-임·형식, 조·굔 팬, 박·은수 텔레비전 드라마가 전성기를 맞이한 90년대 초 공채 탤런트제는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KBS는 이·병헌(1991년 14기), 송·유(1995년 17기)등을 MBC는 오·연수(1990년 19기), 장·동건(1992년 21기)심·배추(1993년 22기), 최·지우(1994년 23기)등을 배출했다.1991년 SBS 제1기 공채 탤런트로 뽑힌 개념·현진, 송·동일은 탄탄한 감초 연기로 사랑 받고 있다.최근 드라마”수상한 삼 형제”의 2번째의 며느리 김희정(40, SBS 제1기)처럼 뒤늦게 빛을 본사례도 있다.2000년대 초 연예 기획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드라마 외주 제작 제도가 확산되면서 공채 탤런트 제도는 급격히 쇠퇴했다.KBS와 SBS는 03년 MBC는 04년 공채 탤런트 선발 제도를 폐지했다.톱스타 거액 출연료가 문제가 되면서 지난해 KBS·SBS가 자체 탤런트 선발 대회를 열기도 했지만 큰 주목을 끌지 못 했다.[출처]:박·세미 조선 일보 에타ー테잉멩토부 방송 담당 기자:<대한민국 제1호>-공채 탤런트-1961년 KBS김·혜자·오·현경 등 26명을 뽑는/조선 일보 2010년 5월 6일 10일 여성 사관생도-1997년”보라매”19명, 금녀의 벽 깬 1996년 초 공군 사관 학교는 이색의 내용이 담긴 학생 모집 요강을 발표했다.한국의 사관 학교 사상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준이 포함된 모집 요강이었다.사관 학교의 여학생의 등장은 김영삼(김·용삼)정부가 여성 인력의 적극적인 사회 진출 정책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됐다.당시 정부가 군에 대해서 사관 학교 문호를 여성에 열것을 주문하고 상대적으로 준비가 빨랐다 공군이 먼저”금녀의 벽”을 깼다.여학생은 남학생과 같이 금주, 금연, 금혼 등”3금”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간단한 기초 화장은 허용되지만 목걸이·귀걸이 등의 액세서리와 매니큐어 등은 쓰지 못 했다.예뻐지기 위한 성형 수술도 금지됐다.같은 건물에 남녀 학생이 함께 생활하는 만큼 서로의 내무실을 오갈 수 있지만 남녀 학생이 함께 있을 때는 반드시 문을 열어 두도록 했다.총검술이나 제식 훈련 등은 똑같이 받지만 여성학이 신설됐고 체육 과목 중 럭비는 소프트 볼에 철봉과 평행봉은 스트레칭과 에어로빅에 대체하도록 했다.이듬해 모집한 공사 49기는 여학생 20명 모집에 444명이 지원했다.경쟁률이 22.2대 1에 달했다.합격자 중 그 해 2월 공사에 실제로 들어온 사람은 19명이었다.그들은 항상”처음”란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2002년 9월 26일에는 박·지영, 박·지원, 팬·윤지 대위(현 계급)가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에 이름을 올렸다.07년 초에는 박 지영 대위가 처음으로 여성 전투기 편대장이 됐다.편 대장은 전투기 4대를 지휘하는 조종사이다.육사는 공사보다 1년 늦은 1998년 58기 선발에서 여학생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23.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4명이 들어왔다.첫 육사 생도의 유일한 강·유미 대위는 그 해 육사 전체 수석으로 합격하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강 대위는 지난해 여성 군인으로선 최초로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육사의 경우 그동안에 입교한 총 여생 수는 315명이다.이 중 54명이 퇴학하고 179명이 임관했다.현재 재학 중 여학생은 82명이다.육군 관계자는 “올해의 여자 학생 선발 경쟁률은 37.5배였다”며”사관 학교에 대한 여성들의 지원 열기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다”라고 말했다.1999년에 여성에 오픈한 해사의 경우 첫 해의 여성 지원자의 경쟁률은 52.1에 달했다.22명 선발에 1149명이 모였다.특히 4년 후에 졸업한 제57기 여학생 가운데 둘이 해병을 지원했다.여학생의 입교는 새로운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해군 관계자는 “추위에 견딜 내한 훈련 때 남학생들만 있을 때는 팬티만 남기어 냈는데, 여학생은 반바지와 반팔 T셔츠는 신기다”라고 말했다.또 여학생들이 자는 방에는 특별히 비상 벨을 설치하고”돌발 상황”에 대비하도록 했지만 생활에 누를 경우가 있는 한밤중에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출처]:조선 일보 사회부의 장·일효은 국방 담당 기자:<대한민국 제1호>-여성 사관생도-1997년”보라매”19명 금녀 벽을 이용/조선 일보 2010년 7월 11일 개신교 교회-고려 인삼 상인 형제가 황해도에 소래 교회를 세운다”여기 사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지난주 화요일(9월 27일)저녁에 14명의 신자에서 한국에서는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 조직을 완료하지 않나!!!”(1887년 언더우드의 보고서)우리는 사방 팔자의 방에 모여서 한국식에 앉았다.제가 영어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가 복음서 1장부터 읽다”(1887년 10월 아펭지에라ー의 일기)19세기 후반 미국 북 장로회와 북 감리회가 각각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펭지에라ー은 1887년 가을, 조선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했음을 알리는 기록을 남겼다.그들이 교회 설립하는 감격을 누릴 때까지 조선에 도착한지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소래 교회, 1895년의 모습 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조선의 쇄국 정책이 해제되어 의료 및 교육 분야에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면 조선 선교를 지원한 것이다.각기 다른 집단에 속했지만 일본에서 만난 그들은 그 해 3월 31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한 상선 미츠비시호에 함께 타고 부산을 지나 이날 경제 좀 포구에 도착했다.당시 아펭지에라ー은 26세, 언더우드는 25세였다.1세차였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키고 선교의 씨를 뿌리고 교육·의료 사업에 앞장 섰다.조선 정부의 전교 금지 방침이 풀리자 두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나란히 교회를 설립했다.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정동 선교사 사택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예배를 갖고 현재 새문안 교회를 창립하고 아펭지에라ー도 그 해 9월에 정동에 베텔 예배당(현재의 정동 제일 교회)를 만들어 10월 9일 처음 공개 예배를 가졌다.이 두 교회는 신도 수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80%를 넘는 장로교와 감리교”어머니 교회”로 불린다.소래 교회(송천 교회):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예배당의 한편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선에는 조선인들이 설립한 개신교 공동체가 있었다.황해도 장연 군 대구면 마쓰 카와리에 1883년 5월에 세워진 “소래 교회”이었다.소래 교회 설립의 주역은 중국을 오가며 인삼 장사를 하고 온 서울·상류은, 경 조 형제였다.서 씨 형제는 1880년대 초, 만주에 온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맛킨 타이아를 통해서 개신교에 접했다.1882년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서적을 속이고 들어온 그들은 검문에 걸리고 투옥되고 탈출한 뒤 친척이 살던 황해도 장연(팬들 헤도·박찬영)로 넘어가면서 소래 교회를 설립했다.서 씨 형제의 열정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서북 지방에 개신교 신앙의 씨를 뿌렸다.1886년경에는 약 70여명이 함께 예배를 행했다는 기록도 있다.1887년 초, 언더우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본격화할 때 그를 찾아 세례를 받았고, 새문안 교회 설립 이후 주축이 된 것도 소래 교회 신도들이었다.또 서울·교은죠은 1901년에 개교한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편입하고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중의 하나가 되었다.경기도 양지에 있는 총 신 대학 신학 대학원의 교정에는 1896년에 증축된 소래 교회의 2번째의 예배당이 복원되어 있다.[출처]:김·한스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개신교 교회-고려 인삼 상인 형제가 황해도에 소래 교회를 세운다/조선 일보 2010년 7월 14일 12일 선풍기, 에어컨-국산 선풍기 1호 전력 사정으로 생산 중단 1960년 3월 여름을 3~4개월 앞두고 한국 독자 기술로 만든 최초의 선풍기가 한국 국민에게 선 보였다.금성사(현 LG전자)이 낸 “D301″이었다.금성사는 금형과 모터를 개발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풍기의 설계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에 처음으로 선풍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그동안 국내에 나온 선풍기의 대부분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등이 만든 외국산 전기 선풍기였다.첫 국산 선풍기”D301″은 알루미늄 날개를 사용하고 날씬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쇠 파이프를 굽히고 몸통을 만들었다.1년 후의 61년 3월 금성사는 “D301″을 보완한 “D302″를 발매했다.이 제품은 날개와 기본대를 플라스틱화하고 모터와 변속기를 사용하고 성능을 향상시켰다.속도를 조절하는 3단 단추도 달았다.1960년 3월 출시된 금성사의 국내 최초 선풍기 D-3011960년 3월 출시된 금성사의 국내 최초 선풍기 D-3011960년 3월 출시된 금성사의 국내 최초 선풍기 D-301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이·승만)이 제헌 헌법 원본에 서명하는 대한민국 국회의 초대 의장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되며 임기를 시작했다.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승만)전 대통령이 1948년 5월 31일 첫 국회 의장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7월 24일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그 해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4일 대통령에 취임<사진>(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국회 의장직을 사퇴했다.이 전 대통령은 1948년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국회 의원부터 188표를 얻어 초대 국회 의장에 당선됐다.95%에 가까운 지지율에서 의장에 당선된 것은 당시”유일한 대통령 후보”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정치적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다.이 전 대통령은 2달을 못 넘기고 국회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국호를 정하고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당시 국내에서는 “대한민국”외에 “한국””조선 민주 공화국””고려 공화국”등 다양한 예비 국호가 난립하고 있었다.”대한민국 임시 정부”초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국호를 “대한민국”에 확정하고 국회는 1948년 6월 3일에 국호를 공식 채택했다.그는 초대 국회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주역이기도 했다.이 전 대통령은 국회를 단원제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관철시켰다.당시 유력 정치가였던 류진 말(오)박사가 주도한 헌법 초안에는 양원제 국회였다.선거로 뽑히는 민의원을 견제하기 위해서 참의원을 병설하자는 명분이었다.이에 대해서 이 전 대통령은 “우리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비용을 늘릴 필요가 없는 상하 양원을 선출해도 그 수준이 비슷해서 아무 쓸모도 없다”며 반대했다.결국 당시 국회 헌법 기초 위원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단원제를 선택했다.지금의 대통령 중심제도 이 전 대통령이 국회 의장을 맡았을 때에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당시 국회는 국가 권력을 입법·행정·사법부에 나눠”3권 분립”에는 큰 이견이 없었지만,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관계를 영국식 내각 책임제로 할지, 아니면 미국식 대통령제로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이 전 대통령은 “내각제를 채택할 경우 정당 간 싸움에서 국가 운영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대통령제야말로 백성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로 대통령제를 옹호했다.논의 끝에 내각 책임제의 주장은 쫓겨나면서 대통령제로 귀결됐다.이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다양한 논의도 없지 않지만 그가 초대 국회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 체제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은 큰 이견이 없다.이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제2대 국회 의장은 바다 공신 익희(신·익희)선생님이 맡았다.이어 제3대 이·기붕, 정·문 흠, 윤·송승 의장 등을 거쳐서 현재 18대 후반 국회는 박·히테 의장이 이끌고 있다.출처]:조·베크 곤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 국회 의장-나·승만 초대 의장 국호 헌법 제정 주도/조선 일보 2010년 7월 23일 14일 철도-한강 홍수로 경인선 개통 1년 지연, 한국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이다.1897년 인천 소 각峴에서 공사를 시작하고 1899년 경제 물포~노량진 노선을 1900년 노량진~서대문 노선을 완공했다.1896년(고종 33년), 미국인 J.R. 모스가 부설권을 얻어 1897년 3월 29일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중단했다.그 이후 중단된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 철도 회사가 인수하고 1899년 4월부터 다시 공사에 들어갔고, 그 해 9월 18일에 완료 물포~노량진 33.2km구간을 개통(시험 운행 중인 경인 전철 기차) 했다.당시 역사적인 경인 전철 기공식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현재 인천 도원 역 근처에 있다.당초 1899년 서대문까지 선로를 건설하기로 했지만 한강에 큰 홍수가 발생하고 한강 철교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 했다.이듬해 1900년 7월 5일에 한강 철교를 준공하고 7월 8일에 노량진~서대문 노선까지 완전 개통했다.당시 이 구간을 기차로 달리는데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지금과 비교하면 느린 속도이지만 서울과 인천을 오가려면 한나절 걷지 않으면 되지 못한 당시 사람들에 경인선 개통은 “천지가 진동하는 ” 대단한 사건이었다.제물포-노량진역 구간 개통제물포-노량진역 구간 개통영암 선 개통,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 놓인 철도는 영암선이다.경상 북도 영주와 강원 철암 사이를 잇는 산업 철도로 1956년 1월에 개통했다.당시는 산업 발전의 기본인 지하 자원의 개발과 수송 때문에 산업 철도 건설이 시급한 과제였다.이런 목적으로 처음 계획된 것이 영암선(86.4km)에서 1949년 4월 8일 착공 1950년 3월 하루 영주~우치지로 간 14.1km구간을 개통했다.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한 공사는 중단되고 휴전 후 1953년 9월 28일 다시 착공 1956년 1월 전 구간을 개통했다.지금은 “영암 선”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49년 착공 당시에는 해방 이후 최대 국책 사업으로 불렸다.태백 산맥을 동서를 가로지르고 건설한 영암선은 순수 한국 기술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험한 지형 때문에 터널과 교량이 많고 높낮이가 심한 게 특징이다.춘양~현동 간 임기 제1터널(971m), 춘양 터널(698m)을 비롯한 33개의 터널은 길이 8312m에 달했다.영암 선 전체 구간의 10분의 1이 터널이었다.교량도 55개로 길이 2843m였다.공사가 가장 힘들었던 경북 봉화 승부 역 부근에 “영암 선 개통비”를 세웠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고 새겼다.영암선은 이후 동해 북부선, 철암 선을 하나로 연결하는 1963년 5월 17일 영동선에 이름을 바꿨다.최초의 고속 철도인 경부 고속 철도는 04년 4월 하루 서울에서 대구까지 1단계 구간을 개통했다.경부선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1980년대 말부터 고속 철도 건설을 추진하면서 1994년 6월에 독일의 이 최 모(ICE), 프랑스의 태양 지에베(TGV)에서 테지에베을 차종으로 채용했다.제1단계 사업에 들어간 비용은 12조 7377억원에 이르렀다.2002년에 착공한 2단계 사업은 대구 부산 구간과 대전·대구 시내 통과 구간을 신설하는 사업으로 11월 완공될 예정이다.[출처]:김·민철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철도-한강 홍수로 경인선 개통 1년 늦었습니다/조선 일보 2010년 7월 28일-15일 청와대 대변인-헌병대 최초의 공보 비서관”성북 동구”시인 김·그아은소프 씨 대통령의 “입”역할을 하는 청와대 대변인은 “성북 동구”시인 김·그아은소프 씨(1977년 사망)부터 시작된다.김 씨는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한 이승만(이·승만)대통령의 첫 공보 비서관에 같은 해 8월 임명됐다.시인으로서 일제 때 교육자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광복 후 미 군정청 공보 국장을 맡아 발탁됐다.당시 대통령 비서 관직제에는 비서관장(현재의 대통령 실장에 해당)아래에 정무 3명, 공보·서무·문서 각 한명씩 등 8명의 비서관이 있었다.당시 대통령 비서실 사무 분담 규정(안)에 따르면 공보 비서관은 공보에 관한 사항뿐 아니라 대통령에 접수된 진정서·건의서의 검토, 사상 대책과 정보 수집 등 민정에 관한 사항까지 담당했다.공보 비서관 취임 직전인 1948년 8월 4일 이 대통령의 제1개각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아무 말도 없다”이라고 논평했다.김 전 비서관은 유신 체제가 등장한 뒤 1974년”대통령”이란 시를 쓰고 우회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비판하기도 했다.국립 공원 지정 전의 1965년 당시 지리산 등산 안내도. 일제 강점기에도 국립 공원 지정 논의가 있었다.1935년 일본인 학자의 타무라 타케시가 백두산, 금강산의 자연 환경을 조사한 뒤 일본 정부에 “금강산을 국립 공원에 우선 지정해야 한다”라고 건의했지만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등으로 무산됐다.세계 최초의 국립 공원은 미국 와이오밍 주 등에 걸친 옐로 스톤 국립 공원이다.미국은 수십 만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며 생긴 화산 고원 지대인 옐로우 스톤을 1872년 국립 공원으로 지정하는 “국립 공원은 모든 국민의 복리와 즐거움을 위한 공공 공원인 위락지”라고 선언했다.이렇게 태동한 국립 공원의 정신은 전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지난해 1년간 연인원 3819만명을 넘는 탐방객이 국립 공원을 찾은 만큼 국민 누구나가 이용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장소로 자리 매김했다.그러나 국립 공원 지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사원을 비롯한 사유 재산 이용 제한에 대한 반발 등이 컸다.국립 공원 관리 공단이 발행한 “국립 공원 30년사”에는 “당시 설악산 신흥사 주지가 건설부 청사에 와서 흉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으며, 경주 불국사도 주민들이 며칠 간 집단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현재 국립 공원은 1988년 지정된 월출산까지 20곳이다.정부는 2012년까지 국립 공원을 2~3곳 추가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출처]:박·우노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국립 공원-“6·25지뢰”설악산 대신 지리산 선정/조선 일보 2010년 8월 4일 16일 인간 문화재-“종묘 제례 음악”감독·해금 연주자 등 20명”한국의 영혼”이라고 할 무형 문화 유산들이 문화재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64년이었다.일제 식민 통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맥이 끊어진 같은 무형의 전통 문화를 보존·계승한다는 취지였다.1962년 5월 8일 열린 문화재 분과 위원회는 “연극·음악·무용·공예 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을 무형 문화재로 지정한다”라고 전제한 뒤 대상 선정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국보·보물 등 유형 문화재와 함께”형태 없는 것”도 문화재로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2년여에 걸친 수차례 논의와 조사 작업 끝에 1964년 12월 7일 제1호 종묘 제례악<사진> 제2호 양주 뵤루상데노리, 제3호 남 사당노리(원래는 조종하는 인형 놀이로 지정됐으나 1988년에 명칭을 변경)이 한번에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다.이때 해당 문화재의 그릇·예능을 보유하는 사람들을 “중요 무형 문화재 보유자”로 지정했지만 이들의 “보유자”를 일반적으로 인간 문화재라고 부른다.” 제1호”의 영예를 안은 종묘 제례악은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에서 조선 시대의 기악 연주와 노래·춤이 어우러진 궁중 음악의 정수이다.1964년 12월 당시 송·교은링(감독)을 비롯한 김·기스(집사 악장)이·암 독수리(표은교은), 김· 먼 훈(해금), 김·테소프(태평초)들 20명 보유자가 지정됐다.대부분이 이 왕의 아악 부양소 또는 국악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국립 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2호로 지정된 양주 뵤루상데노리은 서울·중부 지방에 전승되어 온 상데노리의 한 분파, 노·영 등 16명이 보유자로 인정됐다.3호 남 사당노리은 조선 시대의 유랑 연예인 집단인 남사당의 연희에서 두 사람이 보유자로 지정됐다.그러나 1971년”최초의 인간 문화재”중 13명이 보유자 인정이 해제됐다.1964년 지정 이후에 바뀐 문화재 보호 법에 “무형 문화재 보유자가 30세 미만이면 그 자격이 해제된다”라는 규정이 생겼기 때문이다.1호 종묘 제례 편한 보유자 20명 중 11명이 해제되고 9명만 남았고 1968년에는 김천 오키(바 금·일본 팀)가 추가 지정됐다.2호 양주 뵤루상데노리 보유자 16명 중 두 사람도 “연령 미달”이유에서 해제됐다.이후 신규 지정·통합·해제 과정을 거쳐서 현재 125종목(세부 종목 포함)에서 188명의 인간 문화재가 인정된 상태이다.중요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뵤은챠은 예능 보유자 안·스쿠 손, 38호 조선 왕조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인 한·복료, 42호 악기장 고·훈 곤, 74호대 키바 신·은수, 108호 나무 조각장 박·기회 등이 있다.인간 문화재가 사망할 때는 전승자 중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문화재청장이 지정하는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출처]:허·윤희 조선 일보 기자:<대한민국 제1호>-인간 문화재-“종묘 제례 음악”감독·해금 연주자 등 20명/조선 일보 2010년 8월 17일 정무 장관-독립 운동가 지·청천·이·유뇨은 두 임명대한민국 정무 장관(현재의 특임 장관에 해당)1호는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이 무임소 국무 위원에 임명한 지·청천 장군<왼쪽 사진·전쟁 기념관에 세워진 흉상>와 이·윤영<오른쪽 사진>전 총리 지명자이다.대통령과 대통령의 명을 받고 총리가 지정하는 사무를 수행하는 정무 장관은 전두환(정·두한)정권 출범 전까지는 “무임소 국무 위원 또는 장관”라는 직제로 불렀다.일제 시대, 김좌진(김·자 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정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연못 장군은 한국 독립군 총 사령관 등으로 항일전을 가진데 이어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 의원이 됐다.이 전 총리 대리는 3·1운동 때 독립 선언 강연회를 열다 체포됐으며 옥중 독립 운동가였으며 이승만 정권에서 총리 대행을 맡았다.두 사람은 1948년 8월 12일 무임소 국무 위원에 취임하고 3일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함께 직무를 시작했다.이 대통령은 무임소 국무 위원에 안정적 국정 운영을 위한 “정무”의 역할을 주문했다.실제로 지 청 하늘(지·청천), 이 미츠 사카(이·윤영)위원은 제헌 의회 의석 200석 중 이 대통령이 속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가 55석에 불과하며 무소속이 85석(42.5%)에 달하여, 정파적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서 여야와 정부 간의 소통과 조율에 주력했다.정무 장관이 “대통령·총리와 호흡을 같이 하는 정치 장관”(1997년 12월 정무 장관실이 발행한 정무 장관실 연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처럼 대통령의 정치적 메시지를 갖고 정치권과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박정희(박·정희 정권은 1964년 국가 공무원 정원령을 통해서 명칭을 “무임소 장관”으로 변경하고 정원을 3명(정무명, 경제 두)에 규정하는 등 처음 무임소 장관직을 법제화했다.조·김시현 전 농림부 장관이 최초의 정무 파트 무임소 장관을 지냈고, 이후 김·홍식, 윤·주영, 김·융기, 김·원화 테 킬·지에호, 오·지성, 이·병희 신 동식, 김· 연 김·쟈교무, 최·광수 씨 등이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정무 장관이라는 명칭은 전두환(정·두한)정부가 1981년 4월, 무임소 장관을 폐지하고 신설됐다.정무 장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사용한 것은 정종와(정·죠은텍)씨, 노태우(노·테우)전 대통령도 81년 7월부터 82년 3월까지 정무 장관을 지냈다.이렇게 정무 장관에는 정권 실세가 주로 임명된 이후 정부에서도 이런 흐름은 계속됐다.정·두한, 노·테우 정부에서 “킹 메이커”의 역할을 한 김·윤 황 전 신한국당 대표는 3회 정무 장관을 지냈고, 이·존에, 박·조 사진, 김·동용, 최·형우 등 각 정파의 실력자도 정무 장관을 역임했다.김·독료은 현 청와대 국민 통합 특보도 김·용삼 정부 초대 정무 장관을 지냈고, 서울·정원, 김·영구 신·교은식, 홍·사독 씨 등이 정무 장관을 지냈다.김대중 정부 출범에 따른 폐지됐던 정무 장관직은 2008년 현 정부 출범과 함께”특임 장관”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이명박 대통령은 특임 장관 자리를 비웠지만 지난해 9월 개각으로 대선 후보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주 호영(주·사진)한나라당 의원을 초대 특임 장관으로 임명하고 8·8개각에서는 현 정권의 넘버 2로 불리는 이재오(이·제 오)한나라당 의원을 2대 특임 장관에 내정했다.[출처]:조선 일보 산업부 최·경은 항공 담당 기자:<대한민국 제1호>-정무 장관-독립 운동가 지·청천·이·윤영 2명 임명/조선 일보 2010년 8월 11일.